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원본 그대로 복간 by malick


교보문고·간송미술문화재단 공동 작업 

(서울=연합뉴스) 김중배 기자 =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 그대로를 살린 복간본이 광복 70주년인 올해 한글날을 앞두고 나왔다. 

해례본을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기획하고 교보문고가 제작을 맡았으며, 훈민정음학 연구자인 김슬옹 미 워싱턴글로벌대 교수가 집필한 해설과 영어  번역 내용을 담은 '한글의 탄생과 역사' 해설서를 붙여 출간했다.

간송재단이 소장한 훈민정음 해례본은 일본 식민지 시대말인 1940년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일제 역사 왜곡과 문화적 침탈의 위협에 맞서 당시 기와집 수십채에 이르는 거액을 들여 입수한 유일본이다. 

한글의 명확한 창제 원리와 문자를 조합해 표기하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담고 있는 해례본은 이제 우리 민족과 국가적 유산을 넘어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기록문화유산의 하나이기도 하다. 

전형필 선생의 손자인 전인건 간송재단 사무국장은 6일 교보문고에서 열린 해례본 출판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그간 사진촬영 등으로 만들어진 영인본과 달리 현재 소장중인 원본의 빛바랜 종이질 등을 최대한 원본 그대로 살려낸 복간"이라고 말했다. 


복간본은 한지를 사용해 사침안정법과 자루매기의 전통 제본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세부 구성요소까지 최대한 원본의 분위기를 살려냈으나 '제자해' 부문 등에서 심하게 드러나는, 뒷면의 소장자 첨서가 배겨나온 부분은 깨끗하게 다듬는 과정을  거쳤다.

소장 해례본에 없는 표지의 경우에도 '동국정운' 원본을 참고해 제목 글자의 글꼴과 크기 등 고증을 거쳐 재현했다는 설명이다.  

초판의 정가는 25만원이며, 3천부를 찍었다. 

해설서는 창제 배경과 해례본의 구조 및 내용, 전형필 선생과 해례본에 얽힌 이야기, 한글의 원리 설명 등을 담았다. 원로 국문학자이며 훈민정음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 감수를 거쳤다. 

허균 교보문고 편집장은 "한지에 인쇄하는 일이 쉽지 않아 실제 인쇄 과정에서 인쇄기에 한지 보풀이 끼어 네 번 고장이 나기도 했다"며 "이외에도 제본 과정에서 실과 포장용 보자기의 재질까지 일일이 결정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교보문고 측은 대중 보급판 출간 등을 추가로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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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유화 山有花 09 | 가네와카 선생님! 안녕하세요! 2015-11-20 21:31:41 #

    ... 最近、『訓民正音』解例本が覆刻されたというニュースがありました。 http://goldlife.tistory.com/3602#.Vhcam_iXtng http://malick.egloos.com/6547931 http://kbh3731.blog.me/220502355798 実は、『訓民正音』解例本というのはハングルが出来てから約500年後の1940年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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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虛像 2017/02/28 14:38 # 삭제 답글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 소장처는 안동의 진성이씨 대종가인 주촌(두루) 종택이고 발견당시 보관은 종가의 작은집인 이한걸가이다

    광산 김씨 긍구당이 원 소유주라고 하는 주장은 근거가 없고 긍구당 지인들이 쓴 소설에 불과하고 아래 내용을 보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문화재청의 해례본 발견에 대한 공식 내용을 보면 진성이씨 이한걸가 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28년 1446년 간행) 간송본은 안동의 진성이씨 대종택인 주촌(두루)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을 간송 전형필씨가 종택의 작은집인 이한걸(李漢杰)로부터 아들인 이용준(李容準)을 통하여 구입하였으며,
    일부 긍구당 지인들이 긍구당이 원 소유주라고 하는 주장은 소장의 근거도 증거도 없는 추측 및 왜곡일 뿐이고 주장한 내용도 근거 없는 추론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해례본을 긍구당에서 소장한 기록과 입수한 근거가 전혀 없고 이에 대한 설명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해명도 없습니다. 즉 긍구당과과 지인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쓴 허구이지요.
    또한 긍구당의 역사는 유일재 김언기(金彦璣 1520~1588)로부터 시작되며 世宗대왕(1397~1450) 사후 70여년 지나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즉 두 문중의 역사를 보면 긍구당의 설명은 허구라는 사실을 바로 알수 있습니다
    더구나 긍구당은 65여년동안 일체의 언급이 없다가 관련자들이 다 돌아가시고 마지막에 남은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사위 이용준이 작고한 다음해 사위를 도둑으로 몰아 이런 억지 주장을 하는 건 진실을 은폐하고 회피하기 위한 고의적인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양 가문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원소장처인 진성이씨 대종가: 진성이씨 대종가인 안동 주촌 종가는 고려 말에 시작된 600년 전통의 대종가로 세종 조에 4대 조 이정(李禎: 주촌 종가 不遷位로 退溪 李滉선생님의 증조부)공이 영변판관을 거쳐 최윤덕 장군을 따라 북쪽 여진족을 토벌한 공이 있어 한산부사․선산 도호부사를 역임하셨던 분으로 영변에서 낙향하면서 가지고 와서 심은 향나무가 지금은 천연기념물314호로 지정되어 잘 자라고 있는 안동에서도 유서 깊은 종가입니다.
    불천위(不遷位)란 국가공신 혹은 덕망이 높은 자를 나라에서 정하여 대대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한 것으로서, 조선초기 개국공신부터 후기까지의 덕망 높은 자들이 선정되었다.

    발견 당시 보관처인 이한걸 가(李漢杰 家): 이한걸(李漢杰)은 호가 율재(慄齋)로 영남의 대유학자이자 교육자로 1921년에는 사비로 민족고유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덕전강사(德田講社)를 설립 “동릉학술강습소”을 열어서 서울에서 조재건을 교사로 초빙하여 운영하였고 1927년 女子小學을 편찬하여 우리문화와 한글을 가르치시던 분으로 진성이씨 안동 周村(두루) 대종가의 작은집이 바로 이한걸 가 입니다.

    양가의 관계: 이한걸의 고조부께서 주촌 종가로 양자를 가셨고 증조부는 종가에서 양자를 오셨으며 다시 백부가 종가로 양자를 가셨습니다. 특히 백부 이긍연(李兢淵)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으로 주촌(두루) 대종가 종손이셨습니다. (사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포장을 추서 받음)
    따라서 소장 당시에 양가는 작은집과 큰집 사이였기에 서고의 책은 물론 재산의 개념도 분리되지 않았고 주촌 종가 집 서고는 진성이씨 지손들 에게는 언제나 열려있었으며 이한걸이 주촌 종가로부터 한글교육을 위하여 해례본(解例本)과 동국정운(東國正韻)을 가지고 와서 교육을 하였고 아들인 이용준을 통하여 解例本(국보70호)을 東國正韻(국보71호)과 함께 간송에게 넘긴 것입니다.

    * 유일재 김언기(金彦璣): 김언기는 (1520~1588) 자(字)가 중온(仲溫), 호는 유일재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평생 후진양성에만 힘썼다. 불천위(不遷位) 종가 아님

    문화제청의 해례본에 발견경위에 대한 공식 내용
    1) 문화재청에서는 1962년 12월 20일 간송미술관 소장의 훈민정음해례를 국보제70호로 결정하고, 발굴과정과 구입과정을 이렇게 밝혔다.
    -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가(李漢杰家)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은 그의 선조 이정(李楨)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이 발견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에는 김태준(金台俊)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 되어 있었던 것을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용준은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 낙장 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다고 하며, 이를 입수한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 권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개 삼아 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 2016년 11월 23일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앞 두 장의 낙장 복원과 관련한 문화재청 자문회의에서는 박종덕의 논문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학계에서 검증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훈민정음의 보존상태를 보았을 때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이 아니라 표지 등 앞 두 장이 없는 채로 오랜 기간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해례본 간행과 발견에 대한 년도별 요약
    1443년 (세종25년) 12월30일: 훈민정음 발표
    1446년 (세종28년): 훈민정음 간행 (해례본)
    1448년 (세종29년) 9월 29일: 동국정운(한자음의 훈민정음 표기법) 완성
    1448년 11월: 동국정운 발표
    진성이씨 선조 이정(李禎: 생몰 미상 (세종~세조), 진성이씨 대종가 주촌 종택 不遷位이며 退溪 李滉선생님의 증조부 임) 공이 세종 때 여진족을 물리친 공으로 해례본과 동국정운을 하사 받은 것으로 추정
    1520년: 긍구당 유일재 김언기(1520~1588) 선생 탄생, 세종대왕(1397~1450) 사후 70년 지남 (퇴계 이황 선생님의 제자)

    1921년: 사비로 민족고유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덕전강사(德田講社)를 설립 “동릉학술강습소” 개소
    1927년: 이한걸 여자소학 (한글로 교육한 여성용 소학) 만들어 발간 (해례본과 동국정운을 이용하여 교육한 것으로 추정)
    1933년 9월: 이용준 (당시18세) 김남이(긍구당 女) 와 결혼
    1940년: 해례본과 (국보70호) 동국정운(국보71호) 간송 전형필선생께 매매
    2004년: 이용준 북한에서 사망 추정
    2005년: 박영진 (긍구당 지인) 긍구당 소유 주장 학술지 발표
    위 년도를 보면 긍구당이 소장할 수 있는 서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박영진의 주장이 근거도 없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가 (李漢杰家)에 소장되었던 훈민정음 해례본(국보70호)은, 그의 선조 이정 (李禎)公이 약산성을 쌓고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동국정운(국보71호)과 함께 세종임금으로부터 직접 하사 받은 서책 중 하나로 세전가보(世傳家寶)로 보관되어 오다가 우연한 기회에 간송 전형필이 매입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매입 과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1940년 6월 한남서림에 앉아있던 간송이 고서 중개인 [이순황]으로부터 “경상북도 안동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타났는데, 책 주인이 1000원을 부르기에 돈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간송은 거간인 이순황을 통해 책 주인에게 사례비와 구입비용을 주겠다 약속하고서 일련의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 경북 안동을 내려가게 된다.
    안동으로 내려간 간송이 김태준과 이용준으로부터 세종임금 시절에 이용준의 선조인 이정(李禎) 공이 여진토벌의 공로로 하사 받은 책으로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확인해보니 귀중한 책인 '훈민정음 해례본(원본)'이었습니다. 즉, 당초에는 진성이씨 대종가(주촌종택)에서 물려받았던 것을 종가의 작은집인 영남의 대유학자 李漢杰家(晦養堂)에서 보관하게 되었고, 이한걸의 셋째 아들 이용준이 그의 스승 김태준에게 말하여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당시에 동국정운(東國正韻 국보71호)도 함께 발견되어 간송미술관으로 전해졌다.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되어 있었던 것을 영남의 대유학자인 이한걸 (李漢杰)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이용준은 학자로서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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